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지난 글에 ‘무량대수(無量大數)’라는 숫자를 알아보았습니다. 1 뒤에 0이 68개나 붙는 어마어마한 숫자였죠.
“헤아릴 수 없이 큰 수”라는 의미를 지는 무량대수는 사실 일상생활에서도 거의 쓰일 일이 없는 큰 수입니다.
제가 어릴 때 ‘무량대수’가 제가 알고 있는 가장 큰 수 였습니다. 왜냐하면 무량대수 이후 숫자들에 이름이 있는지 몰랐거든요.
하지만 수학적 상상력과 종교적 철학이 만난 곳에는 이 무량대수를 초라하게 만드는 거대한 숫자들이 존재합니다. 바로 불교 경전인 《화엄경(華嚴經)》에서 유래한 이른바 ‘화엄수(華嚴數)’들입니다.
긍갈라, 아가라, 최승을 거쳐 불가설불가설전으로 이어지는 이 거대 수들의 기원과 그 압도적인 크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.
1. 화엄수의 기원: 무한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
이 수들은 《화엄경》의 제30품인 ‘아승기품(阿僧祇品)’에서 등장합니다.
부처가 심왕 보살에게 ‘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’에 대해 설명하며 숫자의 단위를 하나씩 열거하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. 여기서 숫자는 단순한 계산의 수단이 아니라, 부처의 깨달음이나 우주의 광대함이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무한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입니다.
화엄수의 특징: 계단을 오르듯 제곱하고 또 제곱합니다
화엄수의 가장 놀라운 점은 숫자가 커지는 방식입니다.
우리가 아는 보통의 큰 수는 이렇게 커집니다:
- 만(104) → 억(108) → 조(1012) → 경(1016)
즉, 1만 배(104)씩 커지는 방식입니다.
하지만 화엄수는 다릅니다! 화엄수는 제곱으로 커집니다.
- 1단계: 구지 = 10,000,000 (천만, )
- 2단계: 아유다 = 구지 × 구지 = = (107)2
- 3단계: 나유타 = 아유다 × 아유다 = = (1014)2
- 4단계: 빈바라 = 나유타 × 나유타 = = (1028)2
보이시나요? 앞 숫자를 두 번 곱하면 다음 숫자가 됩니다!
우리가 아는 만(萬) 단위의 숫자는 10,000배씩 커지지만, 화엄수는 앞선 단위를 ‘제곱’하는 방식으로 커집니다.
즉, 107을 기준으로 그 다음 수는 (107)2 인 1014가 되는 식입니다.
이런 기하급수적인 증가 덕분에 불과 몇 단계만 거쳐도 상상조차 불가능한 크기에 도달하게 됩니다.
2. 화엄경에 나오는 숫자들
《화엄경》 아승기품에 나오는 숫자들입니다.
첫 번째 단위인 ‘낙차’부터 마지막 ‘불가설불가설전’까지 각 단계는 바로 앞 단계 숫자의 제곱으로 이루어집니다.
| 이름 (한글) | 이름 (한자) | 수학적 값 (10^n) | 비고 |
| 낙차 | 洛叉 | $$10^5$$ | 100낙차 = 1구지 |
| 구지 | 俱胝 | $$10^{7\times2^0}$$ | $$10^7$$ 천만 |
| 아유다 | 阿庾多 | $$10^{7\times2^1}$$ | $$10^{14}$$ 100조 |
| 나유타 | 那由他 | $$10^{7\times2^2}$$ | $$10^{28}$$ |
| 빈바라 | 頻波羅 | $$10^{7\times2^3}$$ | $$10^{56}$$ |
| 긍갈라 | 矜羯羅 | $$10^{7\times2^4}$$ | $$10^{112}$$ 구골(10100)의 1조배 |
| 아가라 | 阿伽羅 | $$10^{7\times2^5}$$ | $$10^{224}$$ |
| 최승 | 最勝 | $$10^{7\times2^6}$$ | $$10^{448}$$ |
| 마바라 | 摩婆羅 | $$10^{7\times2^7}$$ | $$10^{896}$$ |
| 아바라 | 阿婆羅 | $$10^{7\times2^8}$$ | $$10^{1792}$$ |
| 다바라 | 多婆羅 | $$10^{7\times2^9}$$ | $$10^{3584}$$ |
| … | … | … | … |
| 아승기* | 阿僧祇 | $$10^{7 \times 2^{103}}$$ | |
| … | … | … | … |
| 불가설 | 不可說 | $$10^{7 \times 2^{119}}$$ | $$10^{7\times2^119}$$ |
| 불가설전 | 不可說轉 | $$10^{7 \times 2^{120}}$$ | |
| 불가설불가설 | 不可說不可說 | $$10^{7 \times 2^{121}}$$ | |
| 불가설불가설전 | 不可說不可說轉 | $$10^{7 \times 2^{122}}$$ | $$10^{7\times2^122}$$ |
* 아승기(阿僧祇)와 같은 수는 실제로는 일반적인 명수법에서는 1056을 나타냅니다. 하지만 화엄수의 아승기는 보다 훨씬 거대한 의미로 사용됩니다. 화엄경 내에서의 아승기는 제 105번째 단계의 수로, 지수 부분만 해도 30자리가 넘는 숫자가 됩니다.
(참고: 경전에 따라 중간 단위의 반복 횟수나 명칭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, 기본적으로 제곱의 원리로 124단계까지 나아가는 체계입니다.)
3.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?
화엄수 가운데 몇가지만 의미를 살펴볼까요?
1) 구지: 끝, 정점
$$ 10^7 = 10000000(천만)$$
화엄경의 거대 수 체계는 앞의 숫자를 제곱하며 커지는 규칙을 가지고 있습니다. 구지는 그 규칙이 본격적으로 적용되는 첫 번째 수입니다.
‘구지’는 산스크리트어인 ‘코티(Koṭi)’를 한자로 음역한 단어라고 합니다.
인도에서는 본래 ‘끝’, ‘정점’, 또는 ‘활의 끝부분’을 의미했습니다. 이는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높은 곳을 상징합니다. 고대 인도인들에게 이 숫자는 인간이 일상적으로 상상하거나 셀 수 있는 거의 마지막 단계의 거대한 양을 상징했습니다.
더 이상 이 수보다 올라갈 수가 없다고 생각할만큼 큰 수라고 생각했던 ‘구지’라는 수를 화엄수의 첫 시작인 수로 잡았습니다.
2) 긍갈라(矜羯羅): “무엇을 도와드릴까요?”
$$ 10^{112} $$
긍갈라는 옛날 인도 말로 “킹카라(Kiṃkara)”라고 합니다.
이 말을 우리말로 풀면
- “Kiṃ” = 무엇을
- “kara” = 해야 할까요?
즉, “무엇을 도와드릴까요?”라는 뜻입니다!
옛날 인도에서는 왕이나 주인을 모시는 사람을 “킹카라”라고 불렀다고 합니다. 주인이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가서 “무엇을 도와드릴까요?”라고 묻는 충실한 심부름꾼이었죠.
불교에서는 이 단어를 빌려와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꺼이 따르려는 마음, 끝없이 순종하는 태도를 상징하는 숫자 이름으로 만들었습니다.
3) 아가라(阿伽羅): “지혜가 머무는 집”
$$ 10^{224} $$
아가라는 인도 말로 “Agara”인데, 이 말의 뜻은 “집” 또는 “거처”를 의미합니다.
여러분의 집은 어떤 곳인가요? 편안하게 쉬고, 가족과 함께 지내는 공간이죠?
불교에서 아가라는 부처님의 지혜가 머무는 공간, 깨달음이 사는 집을 의미합니다.
마치 여러분의 집이 사랑과 추억으로 가득 차 있듯이, 아가라는 끝없는 지혜로 가득 찬 ‘우주적인 집’을 상징하는 것입니다.
‘아가라’라는 말이 실제로 이 이름이 사용된 적이 있습니다!
2008년, 아프리카의 짐바브웨라는 나라에서 정말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. 돈의 가치가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것이죠! 빵 한 개를 사려면 지폐를 수레에 가득 담아가야 했습니다. 이때 신문 기자들이 “이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설명하려면 ‘아가라’라는 단어가 필요하다“라고 썼습니다.
수천 년 전 상상 속의 숫자가 현대의 실제 경제 상황을 설명하는 데 쓰인 재미있는 사례입니다!
4) 불가설불가설전(不可說不可說轉): “말할 수 없는 것조차 말할 수 없다”
이 길고 어려운 이름을 천천히 나누어 봅시다:
- 불가설(不可說) = 말할 수 없다
- 불가설 = 또 말할 수 없다
- 전(轉) = 돌고 돌아
즉, “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”는 뜻입니다!
얼마나 큰 숫자일까요?
$$ 10^{7 \times 2^{122}} $$
$$ \approx 10^{3.7 \times 10^{37}} $$
이게 무슨 뜻이냐면 1 뒤에 붙는 0의 개수가 37자리 숫자라는 뜻입니다 0의 개수를 세는 것만으로도 ‘간(澗)’ 단위를 넘어섭니다. 이 숫자를 다 쓰려면 우주 전체를 종이로 채워도 모자랍니다!
4. 왜 이렇게 큰 수를 만들었을까요?
부처님이 심왕보살이라는 제자에게 이 숫자를 왜 가르쳤을까요?
옛날 사람들은 종종 이런 실수를 했습니다:
- “내가 본 게 전부야”
- “우주는 이 정도 크기겠지”
- “내가 생각할 수 있는 만큼만 존재해”
이런 좁은 생각을 불교에서는 ‘광대산수우(廣大算數愚)’라고 불렀습니다. “넓고 큰 수를 헤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”이라는 뜻이죠.
부처님은 이 엄청난 숫자를 통해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?
“네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세상은 훨씬 더 크단다. 겸손하게 배우고 또 배워라.”
5. 마무리: 수를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지점
화엄수들은 단순히 계산을 위해 만들어진 숫자가 아닙니다.
고대 인도인들과 불교 철학자들은 왜 이렇게까지 큰 숫자를 정의했을까요? 그것은 인간의 짧은 수명과 좁은 시야를 벗어나, 우주적인 시간과 공간의 무한함을 생각해보기 위함이었습니다.
“이 숫자를 어디에 써요?”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. 사실 실생활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는 표현들이니까요.
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수에 이름이 붙이려고한 고대 사람들의 생각을 살펴본다면, “수학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넓히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”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.
불가설불가설전이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‘말할 수 없는 것’조차 수학의 테두리 안으로 끌어들인 것입니다. 이 거대한 숫자들은 우리에게 숫자의 세계에 끝이 없음을 보여주며, 동시에 우리의 상상력 또한 무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.
불교에서는 ‘불가설불가설전’을 마지막으로 이름 붙였지만, 지난 글에서 잠깐 살펴본 ‘구골플렉스’보다는 작은 수 입니다. 다음 글에서는 불가설 불가설전보다도 더 큰 수들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!
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!
